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(문단 편집) === 12월 5일, 탈출 준비 === 12월 1일에 시험비행을 한 뒤, 2일부터 5일까지 하갈우리 임시활주로에서는 공군의 C-47과 해병대의 4RD를 이용하여 무려 해병과 육군 부상자 4천 명 이상을 공수했다. 다만 중간에 [[꾀병]] 환자들이 끼어들어 의무관들이 3단계에 걸쳐 후송 지시를 내려야만 후송될 수 있었다. 최종적으로 부상자 4,312명(육군 1,500명)과 시신 173구가 후송되었고, 보충병 500명과 보급품이 하갈우리로 도착하였다. 항공 수송 이전인 11월 27일부터 12월 1일까지는 [[장진호]] 지역에서 아주 위급한 부상자만 헬리콥터와 소형 항공기를 이용해서 후송되었다. 주로 유담리의 해병대원으로 152명에 달했다. 비행기들은 연포 비행장에 착륙하여 해병대 사상자들은 [[흥남]]의 해병 제1사단 병원으로, 육군 사상자들은 [[함흥]]의 121후송 병원이나 흥남 부두에 정박 중인 미 병원선 콘솔레이선 호로 갔다. 아주 급한 환자들은 하갈우리에서 바로 [[일본]]으로 간다. 서부전선 미 8군은 [[평양]]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. 다음날 [[한국군]]마저 후퇴하여 평양은 북한의 손에 넘어갔다.[*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[[평양 철수]] 문서 참고.] 동부전선에서는 미 7보병사단이 [[압록강]] [[혜산]]진에서 신흥리로 철수 완료하였다. [[서울]]에서는 국립박물관이 중요물품을 [[부산]]으로 소개하기 시작할 정도로 전황은 절망적이었다. 놀랍게도 아직도 장진호 동안에 일부 육군들이 살아있어 몇 명씩 도망쳐 왔다. 이날 오전에만 30명으로 구성된 그룹이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하갈우리로 탈출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